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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by 일일신우일신 2020. 11. 9.

철학자 김진영 선생을 생전에는 알지 못하였다. 말기 간암이 발견된 후 13개월 간 병마와 투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삶에 대한 생각을 짧은 글로 남기셨고 사후 출간되었다.


책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일부 글을 옮긴다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있을까.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답해야 하는 , 그것도 사랑뿐이다.

 

내가 존경했던 이들의 생몰 기록을 들추어 본다. 그들이 거의 모두 지금 나만큼 살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생각이 맞았다. 나는 만큼 생을 누린 것이다.

 

돌보지 않았던 몸이 깊은 병을 얻은 지금, 평생을 돌아보면 만들고 쌓아온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것들뿐이다. 그것들이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그것들이 무너지는 나의 육신을 지켜내고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있을까. 이제 나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자꾸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위안을 주려는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게 된다. 병을 앓는 일이 죄를 짓는 일처럼,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환자의 당당함을 지켜야 하건만……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간절한 마음이 된다. 번만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듣던 말의 새로움: 날마다 오늘이 첫날이고 마지막 날이야.”

 

아침 산책. 전선줄 위에 새들이 음표처럼 앉아 있다. 하늘이 푸른 악보 같다. 마음의 바닥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전선들이 그어져 있다. 위에 새들이 아니라 눈물들이 매달려 있다. 혹시 울음도 연주가 아닐까. 지금 내가 정말 울면 눈물들이 새처럼 음표가 되지 않을까. 추락하는 눈물들이 어떤 노래가 되지 않을까. 어떤 비상의 노래……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사라지는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많은 시간이 앞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렇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의 자세가 또한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불행들은 너무 지독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또한 나를 찾고 지킬 있었다는 사실. 특별히 새로운 자세가 따로 있는 아닐 것이다. 그저 본래의 자세에게로 다시 돌아가면 .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나의 장점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라고 발레리는 말한다. 나는 지금 어리석음을 장점인 알고 있다. 돌아보면 사랑들이 지천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들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나의 어리석음이다

 

군포 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 그래서 사랑받을 자격이 충만함을 알게 하고 경험케 부모님에 대한 기억.

 

내가 사랑했던 것들. 모든 것들을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전보다 많이 많이…… 이것만이 사실이다.

 

돌아보면 내가 누군가들 앞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게 나다.

 

병은 시간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깨어나게 만든다. 환자가 아니었을 나는 자주 읽게 되는 환자의 5 생존율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야 모자라면 어떻고 길어지면 무슨 대수이냐고만 여겼었다. 그때 유한성의 경계는 멀고 시간은 다만 추상적 길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간은 더는 추상적 길이가 아니다. 그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자체이다.

 

환자의 삶을 산다는 그건 세상과 인생을 너무 열심히 구경한다는 것이다. 소풍을 끝내야 하는 천상병의 아이처럼. 고통을 열정으로 받아들였던 니체처럼.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마음은 편안하다.

 

여기까지 옮겨보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면 충격을 받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내면의 고통을 우아하고 간결하게 기술한 글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침의 피아노 소리에 대한 단상에서 시작해서 돌아가시기 3일 전 남기신 '내 마음은 편안하다'까지...  

인생의 회한을 사랑과 편안한 마음으로 승화시키신 김진영 선생님의 하늘나라 소풍이 즐겁기를 기원한다. 이 책은 선생님이 남기신 작가의 글처럼 존재의 위기에 처한 모든 이들에게 위안의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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